Letter from Matter #04 타오르미나의 벽 (The Walls of Taorm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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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두 시간 정도면 대충 시내를 다 걸어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이다. 작은 차조차 지나갈 수 없는 골목이 많다. 빛바래지 않은 것이 드문 돌길과 돌벽 사이로,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의 매장들이 구멍가게 크기로 줄지어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휴양지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시내 이곳저곳을 걷다가 Villa Comunale di Taormina(타오르미나 시립공원)에 도착했다. 19세기 영국의 귀족 여성 플로렌스 트리벨리언이 자신의 취향대로 만든 정원이다. 유럽을 여행하던 그녀는 타오르미나에 정착했고, 현지 의사이자 시장을 지낸 살바토레 카치올라와 결혼했다. 그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의 땅을 사들여 정원을 가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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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la Comunale di Taormina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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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에게는 에드워드 왕세자, 훗날의 에드워드 7세와의 스캔들 때문에 영국을 떠났다는 확인되지 않은 비화가 있다. 타오르미나는 그보다 앞서 괴테도 다녀갔고, 여러 예술가가 찾아와 머물던 곳이다. 그러니까 왕자와 사랑하다 눈 밖에 나 유럽을 떠돌다 예술가들의 한 달 살기 명소 타오르미나에 와서는 어쩌다 보니 시장과 결혼했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옛날 로맨틱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내 눈에는 정원 안의 구조물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어떤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고‘자기 마음대로' 지은 것처럼 보였다. 여러 종류의 돌과 벽돌, 재사용한 건축 자재를 콜라주하듯 쌓아 올린 모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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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바다와 환상적인 날씨, 풍요로운 시칠리아 음식, 이솔라 벨라 해변과 에트나 와인 때문에 타오르미나를 신혼여행지로 골랐지만(신혼여행으로 화산만 갈 순 없으니…), 정작 내가 빠져버린 것은 타오르미나의 ‘벽’이었다.
타오르미나는 약 2,4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이다. 그리스와 로마, 아랍과 노르만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스 시대에 반듯하게 다듬어 쌓은 돌, 로마 시대의 벽돌벽, 아랍과 노르만 양식의 영향을 받은 중세 건물의 검은 화산석과 흰 석재 장식. 도시 곳곳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재료와 쌓는 방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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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발에 돌이 하나 채인다. 서울에서 흔히 보던 화강암을 떠올린다. 멀리서 볼 때는 회색 같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분홍색도, 검은색도, 흰색도 보인다. 그저 무늬처럼 보이지만, 장석과 석영, 흑운모 같은 서로 다른 광물이 모여 하나의 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돌. 주먹에 쥐어질 만큼 작든 말도 안 되게 거대하든 하나의 돌이지만, 광물 단위로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물질의 집합체이자 그 물질들이 거쳐 온 시간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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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Heizer, Negative Megalith #5, 1998. Dia Beac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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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만들면서 나는 도자기가 근본적으로 사람이 만드는 암석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러 광물 재료를 혼합해 높은 온도에서 굽고, 다시 식혀 단단한 덩어리로 만드는 일. 말하자면 화산암의 생성 과정을 축약해서 해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타오르미나의 벽도 그렇게 보였다. 서로 다른 돌과 벽돌, 그 사이를 메운 회반죽이 모여 하나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벽 전체를 가마에 넣고 구운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쌓고 덧대고 고치는 동안 서로 다른 재료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타오르미나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벽도 하나의 거대한 암석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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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from Matter는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발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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