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Matter #05
버나드 리치가 온타에 가지 않았다면
(Thinking of Lucie Rie in O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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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박스카를 타고 후쿠오카 하카타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지나왔다. 히타시 산간에 있는 온타 마을에 도착했다. 데이터가 잘 안 터질 정도로 산 깊이 들어가다 보면 요장(도자기 가마와 작업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온타는 일본 민예 운동을 이끈 야나기 무네요시가 그곳의 도자기를 두고 '세계 최고의 민중의 도자기'라고 찬탄한 마을이다. 그리고 영국 스튜디오 도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나드 리치가 1950년대 머물기도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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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icture of Bernard leach in Onta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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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타는 마을 주변에서 채취한 흙으로만 작업한다. 요장은 단 아홉 곳뿐. 소수의 가족 요장이 대를 이어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릇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 대신 온타라는 마을 이름을 새긴다. 70여 년 전 버나드 리치는 이 곳에서 도공들과 함께 작업하며 이곳의 이야기를 글로 써 유럽에 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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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예의 이데아 같은 이 마을을 돌아보며 여기서 나는 별안간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별 상관 없지만, 버나드 리치가 온타에 오지 않았다면 루시 리는 달항아리와 사진을 찍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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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e Rie in her London studio with Korean Moon Jar,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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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설적인 도예가 루시 리와 함께찍은 조선 달항아리 사진. 도자기를 하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아로새기고 있는 이미지. 평생 도자기를 한 백발의 대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었다. 그 옆에는 수백 살의 흰 조선 달항아리. 누군들 이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버나드 리치가 온타에 오지 않았고, 그래서 그만큼 민예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조선의 달항아리를 영국에 가져가지 않았고, 그 달항아리를 루시 리에게 맡기지도 않아서 이 사진도 세상에 없는 그런 평행 우주를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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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한 생각을 마음 한편에 가진 채 마을을 다시 둘러본다. 흙을 찧는 방아 소리가 절의 목탁 소리처럼 들린다. 카라우스(唐臼, kara-usu). 물을 이용해 흙을 찧는 방아다. 한쪽에 물이 차오르면 그 무게로 반대쪽 공이가 들리고, 기울어진 쪽에서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내려와 흙을 찧는다. 일본은 이 소리를 '보존하고 싶은 일본의 소리 풍경 100선'에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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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 근처에 가서 흙을 살펴본다. 황금처럼 노란 온타의 황토가 유독 강한 볕에 반짝인다. 아직 빻아지지 않은 흙은 무른 돌만큼 꽤 단단하다. 정제되지 않은 흙이 이렇게까지 한 가지 색으로 빛을 뿜어내는 건 처음 본다. 아마도 이렇게 완벽한 황토가 나오는 지역이다 보니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 도자기를 만들었구나 생각해 본다.
온타의 도자기는 어딘가 익숙하다. 분청사기가 떠오른다. 온타는 고이시와라의 도공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시작된 곳이고 고이시와라에는 조선 도공으로부터 이어진 계보가 있다. 그러니 조선 도자기를 좋아했던 버나드 리치가 이 마을을 찾아온 것은 이해가 되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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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버나드 리치가 온타에 가지 않았어도 루시 리는 달항아리와 사진을 찍었을까? 답은, 아마도 그렇다. 알고 보니 버나드 리치는 1935년 조선에서 달항아리를 가져왔고, 1943년에는 루시 리에게 맡겼다. 온타에 머문 것은 그보다 뒤인 1954년이었다. 그러니 리치에게 온타는 자신이 좋아하던 조선 도자기의 흔적이 일본 농촌에서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하는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리치가 온타에 가지 않았다면 그의 공동체적 스튜디오에 대한 철학이 유럽에 같은 방식으로 전파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리치와 대비되는 루시 리의 현대적인 디자인과 개인 스튜디오로서의 행보가 덜 부각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또한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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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from Matter는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후에 발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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